“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기도를 마치고 나온 의주의 앞에 젊은 여자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의주를 또렷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의주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자의 표정은 어두웠고 지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의주는 조용히 쭈그려 앉아 남자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사제복의 끝자락이 바닥에 조금 닿았다.“안녕. 나는 요한이야. 이름이 뭐니?”의주가 자신의 세례명을 밝히며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남자아이는 여전히 쭈뼛거렸다. 그러자 여자가 쥐고 있던 남자아이의 손을 살짝 흔들며 지친 목소리로 어서 이름을 말하라 타박했다.“미카엘...”남자아이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주는 계속 웃음을 유지한 채 남자아이의 마음을 최대한 풀어보려 애썼다.“대천사님의 이름을 가졌구나. 멋있는걸?”멋있다는 말에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남자아이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의주는 그런 남자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수도원 구경 시켜줄게. 같이 가볼래?”남자아이는 의주의 손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여자의 손을 놓고 의주의 손을 잡았다. 이런 장면을 몇 번을 더 봐왔는데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장면이었다. 자신이 일곱 살 때 어머니의 손을 놓고 가브리엘의 손을 잡았던 날이 생각났다. 다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 없었던 그날. 의주는 잡념을 떨쳐내려는 듯 한 손으로 무릎을 잡고 힘차게 일어나 남자아이를 이끌고 나갔다. 여자는 끝내 따라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따라올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에 아이를 버리러 오지도 않았을 테니.“저기 있는 나무들은 레몬 나무들이야. 지금 딱 수확할 시기인데 미카엘 너도 같이하면 되겠다 나름 재미있거든. 그리고 음...”의주는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며 미카엘의 눈치를 살폈다. 미카엘은 조금 둘러보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풀이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미카엘,”
“엄마가 울면 안 데리러 올 거라고 했는데... 근데 자꾸만 눈물이 나와요.”의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울든 안 울든, 엄마는 절대 데리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카엘이 아프지 않게 서서히 깨달아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미카엘, 몇 살이니?”의주가 다정하게 묻자 미카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일곱 개 펼쳐 보였다.“나도 일곱 살에 여기에 왔어.”
“정말요?”
“나도 처음엔 너처럼 슬프고 무서웠는데,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 좋은 친구를 만났거든.”의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수도원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마당으로 고개를 돌렸다.“너도 가서 친구들을 만나볼래? 이제 너의 형제들이 될 친구들이야.”의주가 미카엘의 손을 살며시 놓고는 조심스럽게 등을 떠밀었다. 미카엘은 망설이더니 이내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아이들은 처음에 미카엘을 경계했지만 곧 경계를 허물고 같이 뛰어놀기 시작했다. 미카엘도 어느 순간 눈물을 걷고 웃으며 아이들과 뛰어다녔다. 그걸 보면서 의주는,
의주는 니콜라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수도원의 아침은 평화롭다. 지중해의 축복을 머금은 햇볕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일렁이는 형상을 만들어 내면 의주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면서 니콜라스를 생각하곤 했다. 그 아래에서 온갖 춤을 추면서 언젠가는 정말 무대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출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그 애가 생각났다.“요한”멍하니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던 의주가 수도원장 가브리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다.“새로 온 미카엘이라는 아이는 잘 적응하고 있나요?”
“아, 사실 아직은 밤에 혼자 울어서 달래주고 하긴 하는데... 그래도 낮에는 잘 노는 것 같더라고요. 아이들도 미카엘을 잘 챙겨주고 있고...”
“다행이네요. 사실 미카엘을 보니까, 묘하게 요한 생각이 났거든.”
“저요?”의주가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수도원장이 웃음을 터뜨렸다.“물론 미카엘은 동양인도 아니고 생긴 것도 요한이랑 전혀 다르지만... 뭐랄까,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비슷했다고 해야 하나?”
“신기하네요...”미카엘은 동양인도 아닌데 자신과 뭐가 비슷하다는 걸까. 의주는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의주가 처음 이 수도원에 온 날도 여름이었다. 그때에도 레몬 나무들은 레몬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고 햇볕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넘어와 일렁였다. 한국에서 일곱 살 평생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와 둘이 항상 쫓겨 다니며 살다 결국 이 낯선 이탈리아에까지 도착한 것이었다. 일곱 살 의주 역시 미카엘처럼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고, 그런 의주에게 손을 건넨 건 당시 수도원장이 아닌 일반 사제였던 가브리엘이었다.의주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절대 네 이름을 잊고 살지 마, 변의주. 그러면 엄마가 다시 데리러 올게. 의주는 그래서 이름을 절대 잊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가 다시 데리러 오는 일은 없었지만. 일곱 살 아이에게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종교의 교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의주는 다시 데리러 온다는 말을 살면서 딱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어머니에게, 그리고 또 한 번은 니콜라스에게. 물론 아직 두 사람 다 이 말을 지키지 않았다. 어머니가 다시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기에 의주는 스물한 살이나 되어버렸고, 니콜라스가 다시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기에 의주는 겁이 많았다. 그때 떠나는 니콜라스를 겁이 많아서 따라가지 못했는데, 다시 데리러 온다고 해서 이번에는 같이 떠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을 할 수는 없었다. 3년의 세월 동안 둘의 세상은 너무 달라졌을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의주는 수도원에서의 생활이 좋았다. 평화롭고 조용한 이곳은 의주의 성격과 잘 맞았다. 기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레몬을 수확하고. 이렇게 잔잔하게 살아갈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그런데도 자꾸만 니콜라스가 생각났다.
그날 마셨던 피의 맛이 선명하게 입가에 맴돌았다.미카엘은 수도원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아주 적응하여 활발하게 지냈다. 의주는 수도원장의 말 때문인지 유독 미카엘이 더 신경 쓰였다. 그런 미카엘이 잘 적응한 모습을 보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미카엘 역시 의주를 잘 따랐다. 언제나 신기하고 예쁜 걸 보면 의주를 불러다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미카엘은 의주를 불렀다.“요한! 누가 찾아왔어요! 팔에 큰 흉터가 있어요.”팔에 큰 흉터. 의주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팔에 큰 흉터를 가진, 이 작은 시골 수도원을 찾아올 사람은 어쩌면.
의주는 미카엘의 손을 꼭 붙잡고 천천히 걸어갔다.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계속 땅만 바라보다 미카엘이 멈춰 섰을 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오랜만이야, 의주.”선명한 한국어. 이 수도원에서 유일하게 요한이 아니라 의주라고 불러주던,“니콜라스.”
1. 고혈의주는 일곱 살에 버려졌다. 자세한 이유는 몰랐다. 언제나 쫓겨 살았고 어머니는 언제나 지쳐 있었다. 아마 더 이상 의주를 책임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멀리, 아주 멀리 아무도 찾아올 수 없게 이탈리아의 깊숙한 시골 수도원에 의주를 버렸다. 버릴 거면 다시 찾아온다는 말은 왜 한 걸까. 의주는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변의주라는 이름 세 글자만 잊지 않고 살아갔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데리러 오기를 바라서 기억했던 거였지만, 언제부턴가는 그저 습관처럼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한글 이름 세 글자를 불러주는 니콜라스를 위해 기억했다.니콜라스. 이 수도원에는 딱 두 명의 동양인이 있었는데 한 명은 의주였고 다른 한 명은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는 의주와 동갑이었다. 갓난아기였을 때 이 수도원 앞에 버려져서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이탈리아어를 모국어로 삼고 살아갔다. 그런 니콜라스에게 같은 동양인인 의주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의주가 온 첫날부터 온갖 말을 걸었지만 의주가 알아들었을 리는 없다. 의주는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울고만 있었고, 니콜라스는 자꾸만 말을 걸고 이것저것 장난감을 건넸지만 둘은 서로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래서 겨우 일곱 살짜리 니콜라스는 이 수도원에서 자신과 비슷한 유일한 존재인 의주를 위해 사제 가브리엘에게 저 애의 모국어를 배울 수 있게 해달라 부탁했다. 가브리엘은 마음이 여렸다. 그래서 엄격한 수도원장 몰래 니콜라스에게 한국어 교습 책을 구해다 주며 니콜라스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도와줬다.“안녕. 나는 니콜라스야. 네 이름은 뭐니?”의주가 조금은 덜 울게 됐을 때쯤, 니콜라스가 서툰 한국어로 이 말을 건넸다. 인사와 자기소개 그리고 이름을 묻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의주는 눈을 끔뻑거렸다. 니콜라스가 설마 저 애의 모국어는 한국어가 아니었던 걸까 하고 절망하던 찰나, 의주는 작은 입을 열었다.“... 변의주.”의주는 아직도 그 상황을 기억했다. 이름 하나 들었다고 뭐가 그렇게 기쁜지 강렬한 지중해의 햇볕보다 더 환하게 웃던 니콜라스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했다.니콜라스는 특이한 아이였다. 말을 지독하게도 안 들었고 그래서 자주 벌 청소를 도맡곤 했다. 뛰어다니다 접시를 깨고, 공을 던지고 놀다가 창문을 깨고, 자기보다 두 배는 덩치가 더 큰 형과 시비가 붙어서 싸우고, 하루도 얌전한 틈이 없었다. 그런 니콜라스의 옆에 있으면 의주의 세상 역시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그게 점차 싫지 않았다. 밤이 고요하면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같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복도를 거니는 사제들의 발걸음에 귀를 기울이며 몰래 소곤거리는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의주의 세상을 가득 채웠다. 더 이상 밤이 무섭지 않았다.열세 살쯤 되었을 때, 의주는 이탈리아어를, 니콜라스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니콜라스는 똑똑했다. 언어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물론 의주와 하루빨리 더 자세히 대화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런 거일 수도 있었다. 의주가 모국어를 까먹지 않기 위해 한국어로 된 성경을 읽을 때면 니콜라스는 어깨 너머로 따라 읽으며 한국어의 감을 잃지 않았다. 이 수도원에서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 뿐이었다. 한국어는 오로지 의주와 니콜라스만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줬다.
“있잖아, 의주.”
“응?”
“나 어쩌면 한국인일 지도 몰라.”
“한국인이라고?”
“어. 나 한국어가 잘 맞는 거 같아. 그렇지?”니콜라스는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고 의주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우리가 정말 같은 나라에서 온 걸까? 그러면 우리는 이곳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었을까? 의주는 니콜라스와 달리 실없는 이야기를 머릿속으로만 했다.니콜라스가 진짜 한국에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니콜라스가 만약 한국인이었다면 동양인에게는 어색한 세례명이 아닌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까. 의주는 몰래 니콜라스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보곤 했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곤 했다. 니콜라스는 니콜라스가 제일 잘 어울렸다.변성기가 오기 시작하고 뼈마디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할 때쯤, 소년들은 바깥세상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이 좁은 시골 수도원의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가 아니라 수천수만 명의 관객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춤을 추고 싶어 했다. 이런저런 동작을 하며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형형색색의 햇볕 아래에서 춤을 추는 니콜라스를 수도원장은 달갑게 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니콜라스의 불만 역시 쌓여가고 있었다. 물론 조용하고 얌전하다고 예쁨 받았던 의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잖아. 이렇게 말하면 니콜라스는 늘 눈을 가늘게 뜨고 의주에게 투덜거렸다.“하지만 의주도 나 춤추는 거 좋아하잖아.”이렇게 말하면 의주는 늘 말을 잃었다. 사실이었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춤을 좋아했다. 언젠가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조금 두려워질 정도로, 니콜라스의 춤은 자유로웠다. 그러다 네가 정말 날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나는 이 작은 시골 수도원에서 영원히 영원히 너랑 같이 있어도 행복할 거 같은데.
하지만 니콜라스는 이 작은 시골 수도원에서 영원히 영원히 있으면 불행해서 죽어버릴 사람이었다.
변성기가 슬슬 지나가기 시작하고 뼈대도 자리 잡기 시작할 열여섯 살쯤,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나 떠날 거야.”의주는 처음에 이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해가 지나면서 이 수도원에서 같이 지내던 또래 아이들은 하나둘 새로운 집으로 입양을 가거나, 드물게 운이 좋은 경우 부모님에게 돌아가곤 했다. 의주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열여섯이 될 때까지 수도원에 남은 아이들은 의주와 니콜라스를 포함해 네 명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나머지 두 명은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아도 도무지 친해지기 힘들 정도로 성격이 달랐다. 의주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니콜라스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그 떠난 모든 아이들이 만약 이 수도원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니콜라스였을 것이었다. 그런 니콜라스가 떠난다니. 의주는 니콜라스가 새로운 가족을 찾았거나 어쩌면 친부모님을 찾아서 떠나는 거라 생각했다.“축하해.”아무리 아쉬워도 의주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었다. 수도원에서는 떠나는 형제를 축복해 주는 게 당연하였다. 할 수 있는 건, 축복을 비는 기도를 해주는 것뿐이었다.“너도 같이 가자.”물론 의주는 니콜라스가 이렇게 말할 줄 전혀 몰랐다.“무슨... 소리야?”
“내일 밤에 몰래 빠져나갈 거야. 언제까지 여기서 살 순 없어.”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입양이 되거나 부모님이 데리러 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수도원 밖으로 나간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입양이 되거나 부모님이 데리러 온다는 것조차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의주의 미래는 영원히 이 수도원에서 니콜라스와 지내는 것이었다. 언제 어른이 되었는지 눈치채지도 못한 채로 같이 살아가는 것뿐이었다.“난, 난 못 가.”
“왜?”
“나가면... 나가면 어떻게 살아?”
“어?”의주의 물음에 니콜라스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가지 마. 그냥 여기서 살면 되잖아. 너랑 나랑 같이.”의주가 니콜라스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니콜라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니콜라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밤을 틈타 몰래 사라진 것이었다. 수도원은 발칵 뒤집혔고 수도원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애먼 다른 아이들에게 화풀이했다. 특히 니콜라스와 친했던 의주에게 화풀이를 심하게 했다. 소리를 지르고 매를 드는 수도원장을 눈앞에 두고도 의주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이들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던 사제 가브리엘 역시 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요한, 네가 니콜라스랑 가장 친했잖니. 혹시 니콜라스가 너한테 어디 가는지 말 안 해줬어?”수도원장과 달리 차분하게 물어보는 가브리엘의 말에 의주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니콜라스가 이런 상황이었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걸 알았기에 더욱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니콜라스가 없는 수도원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의주의 밤이 다시 고요해졌다. 견디기 힘들었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는데, 기도 역시 잘 나오지 않았다. 너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어쩌면, 어쩌면 이미 죽었으면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기도문을 집어삼켰다. 걱정은 악마와 닮아서,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거짓말처럼 니콜라스가 의주의 옆에 누워 있었다. 숨결이 닿을 때마다 정말, 거짓말 같았다.잠에서 깬 니콜라스는 아무렇지 않게 의주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가방 속에서 뭔가를 잔뜩 꺼내 놓고서는 이것저것 자랑하기 시작했다.“봐봐 이건 초콜릿이고 이건 감자칩 그리고 이건 소설책인데,”
“넌... 넌 왜 아무렇지 않아?”의주는 무심결에 니콜라스의 말을 끊고 이렇게 물었다. 정말 궁금했다. 밖에 나가는 데에 성공했으면서. 그렇게 원하던 자유를 얻었으면서. 근데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왜 다시 아무렇지 않게 내 옆에서 잠들어 있었던 거야? 나는 내 옆에 잠들어 있는 너를 또 천사라고 착각해 버렸는데.니콜라스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곧 잠에서 깬 다른 아이들이 수도원장과 가브리엘을 불러 니콜라스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이 낡고 좁은 수도원의 다락방은 바람이 훤히 들어오는 창문이 해를 등지고 있는 서늘한 방이었는데, 수도원장은 아이들이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르면 최후의 수단으로 그 방에 하루 종일 가둬 놓은 뒤 고해 기도문을 쓰게 시켰다. 이때까지 그 방에 갇혔던 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아이였는데, 그 아이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시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다락방은 고해의 방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의 감옥이 되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 방에 대한 온갖 괴담이 돌았고, 의주와 니콜라스 역시 그 괴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고해의 방에 니콜라스가 갇히게 됐다. 의주에게는 적잖게 충격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역시나,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화가 날 정도였다. 괘씸했고 분했다. 차라리 울기라도 하면 달래 줄 텐데, 니콜라스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고해의 방에 한 아이가 갇혀 있을 때, 다른 아이들은 근처에 가선 안 됐다. 하지만 의주는 그걸 무시하고 고해의 방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에 계단에서 내려오는 가브리엘을 마주쳤지만, 가브리엘은 못 본 척하고 넘어가 주었다. 의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가 고해의 방문에 등을 기댄 채 털썩 앉았다.“니콜.”의주가 나지막이 부르자 한참 뒤 니콜라스의 대답이 돌아왔다. 의주는 그 대답을 듣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밖은 어땠어?”의주가 앉아 있는 마룻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이 덜컥거리는 바람 소리와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작지만 아기자기한 이 수도원에서 유일하게 아름답지 않은 공간이었다.“의주가 없었어.”니콜라스의 답에 의주는 헛웃음을 지었다.“당연한 소리.”
“진짜야 그렇게 느꼈어.”
“그럼...”의주는 무릎을 모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없는 세상은 어땠어?”가시가 박힐 것 같이 낡은 나무문을 사이에 두고 니콜라스와 등을 기대고 있음이 느껴졌다. 닿아 있지 않아도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오래 봐왔다.“그래서 돌아왔어.”니콜라스의 대답에 의주는 또 헛웃음을 지었다. 실없는 소리. 너는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잘도 내뱉는다.“너는 왜 여기 왔어?”이번에는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물었다. 의주는 문에 등을 더 바짝 붙였다.“기도 해줄게.”니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주는 손을 모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주님. 오늘 밤이 부디 춥지 않게 넘어갈 수 있게 해주소서. 밤이 춥지 않고, 달빛이 따스하며 바람은 부드러울 수 있게 해주소서. 혼자 있는 저의 형제가 두렵지 않게 해주시옵고 주님의 은혜로 보살펴 주시옵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아멘.”의주의 기도가 끝나자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다 듣고 나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문 너머에서 의주의 기도를 들었을 니콜라스의 모습을 상상했다. 달빛이 속눈썹에 내려앉은 모습을 상상했다가 이내 떨쳐내곤 했다. 너무 자세히 상상하는 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고해 기도는 다 썼어?”
“어 이미 다 썼어. 그냥 벽에 낙서나 하다가 자려고.”
“그러면 또 혼나.”
“의주는 너무 겁이 많아.”니콜라스의 말에 의주는 묘한 감정이 북받쳤다. 같이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한 빈정거림인가?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겁이 많아서 안 나갔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열여섯 의주의 세상은 오직 수도원뿐이었다. 이 수도원에서 처음과 같이 니콜라스와, 이제 니콜라스와, 항상 니콜라스와, 그리고 영원히 니콜라스와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 모든 게 변하는 건 싫었다.니콜라스가 고해의 방에서 나왔을 때, 수도원의 아이들은 일제히 니콜라스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봤다. 마치 살아 돌아온 고대의 영웅과도 같았다. 니콜라스는 그런 시선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니 즐거워 보였다. 의주는 그런 니콜라스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러다 잠시 후, 수도원장이 의주를 불렀다. 수도원장의 방 앞으로 갔을 때 그 방에서 나오는 니콜라스와 마주쳤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또 무슨 잘못을 한 거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니콜라스는 그저 실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의주는 그런 니콜라스를 뒤로하고 수도원장의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요한, 니콜라스 녀석이 고해 기도를 한국어로 써서 냈어. 저 녀석을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네가 해석해 줄 수 있겠니?”수도원장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은 채 의주에게 니콜라스의 고해 기도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의주는 그 종이를 받아 찬찬히 살폈다.역시나 니콜라스. 너는 이번에도 나를 시험에 빠뜨리는구나. 의주는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의주 너 지금 이거 보고 있지?“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아마 수도원장님은 나를 못 믿겠다면서 너한테 이탈리아어로 읽게 시킬 거야.“저는 주님의 뜻을 거역하고 허락되지 않은 곳으로 향했습니다.”의주는 똑똑하니까 아마 즉석에서 잘 지어서 읽을 수 있을 거야 그렇지?“주님께서 허락하신 에덴동산에 만족하지 못하고”있잖아 의주, 바깥세상은 정말 놀라웠어. 네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저는 그만 그 낙원을 제 발로 떠났습니다.”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있었어. 그리고 그 두 세계가 섞인 세상은“그 벗어난 세상은”아름다웠어.“참혹했습니다.”의주“주님”이번에는 연습이었어.“호기심에 이런 죄를 지은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나는 기회를 봐서 또다시 떠날 거야.“다시는 허락되지 않은 세상에 나아가지 않겠습니다.”그때는 꼭 너와 같이 떠나고 싶어.“주님의 품 안에서”더 넓은 세상 밖에서“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너를 사랑하고 싶어.“...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의주가 나지막이 뱉고는 입술을 다물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한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수도원장의 방에서 빠져나와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서 의주를 기다리고 있던 니콜라스를 마주쳤다.“내 말이 맞지? 너한테 읽게 시킬 거라는,”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어,”의주는 결국 니콜라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태어나서 누군가의 멱살을 붙잡아 본 건 처음이었다. 의주보다 약간 작은 니콜라스의 발꿈치가 살짝 들렸다. 니콜라스의 멱살을 잡은 의주의 손이 벌벌 떨렸다. 손에 힘이 워낙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니콜라스는 힘으로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의주를 바라보았다.“네가 밖에 나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수도원장님이 얼마나 화내셨는데. 괜히 다른 애들이 혼났어. 그리고 나도 맞았어. 너 하나 자유로워지자고,”
“그래서 억울해?”니콜라스의 말에 의주는 손에 힘이 빠졌다. 옷자락이 의주의 손을 스쳐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의주를 올려다보는 니콜라스의 눈빛이 서늘했다.“그럼 너도 나 때려. 나 때문에 맞아서 억울하면 나도 맞으면 될 거 아니야.”니콜라스는 의주의 손을 확 잡아 올렸다. 의주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의주는 차마 니콜라스를 때릴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팔을 뿌리쳤다.“... 무슨 의미로 쓴 거야.”
“뭐?”
“나를 왜 사랑하고 싶은데.”
“그거야,”
“우린 형제니까? 같은 언어를 쓰니까? 어쩌면 같은 나라에서 왔을지도 모르니까?”서늘했던 니콜라스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말을 뱉어내느라 벅찬 의주가 숨을 얕게 내쉬었다.“... 그럼 그렇게 해. 대신 나가지 마. 떠나지 말란 말이야. 나를 사랑하고 싶으면, 이 수도원 안에서 그렇게 해.”의주가 울음을 삼키며 겨우 말했다. 목이 시큰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니콜라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난 그럴 수 있어. 근데 넌, 넌 그럴 수 있어?”
“어?”
“난 이 좁은 수도원 안에서도, 아니면 넓은 세상 밖에서도 의주 널 사랑할 수 있어. 근데 의주는 그럴 수 있어? 넌 이 수도원 너머의 넓은 세상 속에서도 날 사랑할 수 있냔 말이야.”
“그게 무슨,”
“넌 못 할 거야. 내가 아무리 세상 밖으로 같이 나가자 해도 넌 끝끝내 그 세상 속 날 사랑하지 못할 거야. 네 세상은 오직 이 좁은 수도원뿐이니까.”니콜라스는 그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의주는 한동안 멍하니 복도에 혼자 서 있었다. 니콜라스의 말이 귓가에 계속 울렸다.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네 세상은 오직 이 좁은 수도원뿐이니까. 네 세상은 오직 이 좁은 수도원뿐이니까. 네 세상은,니콜라스 넌 분명 네 세상에 내가 없어서 다시 돌아왔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다시 떠나려는 거야. 왜 자꾸만 다시 내가 없는 세상으로 떠나려는 거야.그날 이후로 한동안 니콜라스와 의주는 서로를 멀리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자주 아웅다웅하곤 했지만 이렇게 심하게 싸운 건 처음이었다. 이 둘의 분위기를 눈치챈 가브리엘이 둘의 사이를 개선하려 애썼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먼저 항복한 건 니콜라스였다. 자존심은 의주보다 셌지만, 언제나 싸우고 나서 먼저 굽히는 것도 니콜라스였다. 수도원의 아이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니콜라스는 의주를 툭툭 건드렸다.“안 자는 거 알아.”
“그럼 그냥 놔두지. 잠 좀 들게.”
“이거 볼래?”니콜라스의 말에 돌아누워 있던 의주가 결국 눈을 살짝 뜨고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니콜라스는 손에 들고 있던 소설책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게 뭔데.”
“내가 밖에서 가져온 소설책.”
“... 관심 없어.”
“야 아냐 한 번만 봐봐 진짜 재밌어.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악마의 얘기야.”
“피를 빨아먹어?”니콜라스의 말에 결국 넘어간 의주가 니콜라스의 옆으로 슬그머니 붙었다. 니콜라스는 달빛에 의존한 채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소설의 내용은 단순했다. 흡혈귀가 인간들의 피를 빨아먹다 한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그 인간이 흡혈귀의 피를 빨아먹으며 영원을 맹세하는 진부한 내용이었다. 물론 수도원에서 나고 자란 소년들에게 악마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아주 자극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둘은 소설책을 읽었고 아침 미사에서 조는 바람에 복도 청소를 도맡게 되었다. 늘 그래왔듯이 둘은 다시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절대 싸우기 전, 그리고 니콜라스가 한 번 탈출하기 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둘은 암묵적으로 그날의 일들을 말하지 않았다. 절대 잊어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절대 말할 수 없었다.니콜라스가 언젠가는 다시 떠날 걸 의주는 알고 있었다. 그와 관련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의주가 느꼈던 불안함은, 니콜라스가 정말 창문 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열여덟이 될 때까지 니콜라스는 얌전히 수도원 안에 머물렀다. 의주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이렇게 같이 이 수도원에서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사제로서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영원히 형제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다.수도원장은 의주를 볼 때마다 니콜라스를 잘 감시하라고 당부했다. 수도원장은 예민하고 꽉 막힌 성격이었으니 니콜라스가 사소한 잘못만 해도 버럭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가끔 그 화가 의주에게 번지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의주는 순종적인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니.
니콜라스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오르간을 연주했다. 오르간은 어릴 때부터 니콜라스의 재능을 알아본 가브리엘에 가르쳐 준 거였고, 열여덟이 되자 미사 시간에 직접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오르간 연주가 좋았다. 오르간은 예배당의 창문이 있는 벽과 반대쪽 벽에 붙어 있어서 햇볕이 아무리 길게 늘어져도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니콜라스의 뒷모습까지 닿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니콜라스의 연주는 묘하게 서늘했다. 의주는 그 서늘한 연주가 좋았다.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읽곤 했던 소설책 속의 흡혈귀가 실존한다면, 니콜라스의 모습을 닮았을 것 같았다. 똑같이 지중해의 강렬한 여름을 나고 자랐으면서, 니콜라스의 피부는 의주의 것보다 훨씬 창백했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창백한 피부를 멍하니 뚫어져라 봤다가 묘한 기분이 들어 그날 밤 내내 기도를 올렸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 니콜라스. 왜 너를 가만히 바라보면 죄를 짓는 기분이 들까.
그리고 니콜라스는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다. 의주가 눈치채지도 못할 틈에 훌쩍 떠나버렸다. 의주의 좁은 세상에 큰 빈틈이 생겼다.이번에는 화를 낼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예상했던 이별이었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멱살을 잡았던 그날부터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이별이었다. 언젠가 떠날 거라고 했으니 차라리 이렇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난 게 나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수도원장은 2년 전과 똑같이 크게 화냈고 다른 아이들에게 화풀이했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잘 감시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고해의 방에 갇히게 되었다. 어릴 때는 그렇게 무서웠는데, 막상 들어오니 그다지 어둡지도 그다지 춥지도 않았다. 그렇게 좁지도 않았고 그렇게 허름하지도 않았다. 창문이 커서 달빛이 훤히 들어왔다. 고해 기도를 쓰는 건 금방 끝났다. 딱히 고해해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을 지어내서 대충 적었다. 고해 기도를 적은 종이를 옆으로 제쳐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별도 보이지 않고 오직 환한 달만 보였다. 그 달빛이 창틈으로 흘러 들어온 곳에 시선을 옮겼다. 벽에 작은 글씨가 보였다. 의주는 벽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글자를 자세히 보았다. 한글이었다. 또박또박 적은 한글. 손끝으로 글자를 천천히 훑으며 읽어 내려갔다. 다시 데리러 올게. 이 한 문장뿐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이었는데. 의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걸 못 봤으면 어쩌려고. 니콜라스는 무모한 사람이었다.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는 밤이었다. 니콜라스가 고해의 방에 갇혔던 그날 밤처럼, 의주는 다시 한번 기도를 올렸다. 나의 형제 니콜라스. 춥지 않도록, 그리고 외롭지 않도록.그러다 창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눈을 살짝 떴다. 이내 창문이 왈칵 열리고 누군가의 형상이 보였다. 창틀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니콜라스.”니콜라스는 의주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의주는 놀라서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환각일까. 어쩌면 꿈일까. 꿈이라면 악몽일까.“설마 했는데 진짜 여기 있었네.”니콜라스는 여유로워 보였다. 뭐가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건지.“거짓말...”
“왜 거짓말이야. 진짜 나야 의주. 데리러 왔어.”
“어째서...?”의주의 물음에 니콜라스는 서늘한 그 눈을 끔뻑이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말했잖아. 나는 세상 밖에서 너랑 살아가고 싶어.”
“... 나를 사랑하면서?”의주가 천천히 일어나 니콜라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니콜라스는 의주에게로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그리고 천천히 의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의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니콜라스는 한 번 더 의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콧잔등으로, 코끝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의주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던 순간, 의주가 니콜라스를 살짝 밀어냈다.“아냐, 안 돼.”의주가 다급하게 말하자 니콜라스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의주는 괜히 숨이 가빠져서 심호흡하고는 니콜라스를 다시 바라봤다.“미안, 미안해,”
“... 있잖아.”니콜라스가 겨우 입을 열자 의주는 괜히 울컥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떨리는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했다.“내가 왜 자꾸만 나가려고 하는지 알아?”
“어?”
“내 가장 먼 꿈이 세상 밖에 있어서야. 내가 이 좁은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면서 늘 바라봤던 나의 가장 먼 꿈이, 이 창문만 넘어가면 있단 말이야.”니콜라스의 몸이 엷게 떨렸다. 달빛이 니콜라스의 어깨를 서늘하게 감쌌다. 그 모습은 천사와 같았고, 어쩌면 악마의 모습이기도 했다.“근데 다시 돌아왔어. 너한테 다시 달려왔어. 나는,”의주는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니콜라스가 꾹꾹 눌러 담아 전하는 진심이 무서웠다.“나는 나의 가장 먼 꿈조차 버리고 달려온 거야. 다시 또 너한테 달려오고 만 거라고.”
“... 왜?”무슨 감정을 담아 물은 건지 의주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이유가 궁금했던 걸까 어쩌면 단순한 원망이었을까. 복잡한 진심을 단 한 마디에 담아 전했다. 그 진심이 닿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달빛에 조금씩 잠식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다 달빛이 둘을 다 삼키기 전에, 니콜라스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이 몸을 살짝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네가 나의 가장 가까이에 닿아 있는 꿈이었으니까.”니콜라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창문 옆의 책상에 놓인 촛대를 낚아채 유리창을 내려쳤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맑은 종소리와 같이 유리가 조각조각 부서졌다. 니콜라스는 깨진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뭐 하, 뭐 하는 거야,”의주가 니콜라스를 말리려 했지만 니콜라스는 왼손에 쥔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오른쪽 팔을 죽 그었다. 피가 뚝뚝 흘렀다.“나에게 입 맞출 수 없으면 내 피에 맹세해. 예수님의 고혈에 맹세한 것처럼 내 피에 맹세해.”니콜라스가 피 흐르는 팔을 의주에게 내밀었다. 의주는 덜덜 떨리는 니콜라스의 팔을 보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달빛이 의주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우리가 같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밤 내내 읽어 내려갔던 책이 생각났다. 흡혈귀가 나오는 소설책. 피를 마심으로써 서로에게 영원을 약속했던 그 책. 나는 피가 흘러 내리는 너의 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조금씩, 조금씩 삼켰다. 비릿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너의 찌푸린 미간이 보였다. 너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흡혈귀는 나였어. 네가 아니라, 나였어. 네 피를 마시면 우리가 영원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너랑 같이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나는 너의 피를 마셔서 너에게 맹세했어. 다른 세상에서 살아갈 우리가, 영원할 것을 맹세했어.그날 밤 니콜라스는 영영 떠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깨진 창문과 핏자국을 보고 가브리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날 고해의 방에서 있었던 일은 오로지 의주와 니콜라스만 알고 있었다.니콜라스가 떠나고 몇 달 뒤 수도원장은 죽었다. 의주는 니콜라스가 저주를 내리고 간 걸까 생각도 해봤지만, 마음이 여려서 그런 짓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곧 가브리엘이 새로운 수도원장이 되었고 고해의 방은 더 이상 감옥으로 쓰이지 않았다.의주는 사제가 되었고, 고해의 방을 자신의 방으로 쓰게 해달라 했다. 가브리엘은 이번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의주 역시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마음은 없었다. 고해의 방 벽에 니콜라스의 말이 적혀 있어서였다. 이 수도원에서 유일하게 남은 니콜라스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이 방에 있으면 니콜라스가 다시 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날 밤처럼, 니콜라스의 피에 맹세했던 그날 밤처럼.문득 의주는 니콜라스가 그때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니콜라스가 말하고 싶었던 단어는 ‘보혈’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의주의 어깨 너머로 한국어를 익혔던 니콜라스가 보혈과 고혈을 헷갈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의주는 보혈이라는 단어보다 고혈이라는 단어가 더 좋았다. 의미는 전혀 달랐지만, 고혈은 고해와 발음이 닮았고, 고해는 고백과 발음이 닮아서였다.의주는 니콜라스가 영영 찾아오지 않길 바랐다. 이번에 다시 데리러 온다고 해서 흔쾌히 따라나설 자신이 없었다. 또 니콜라스에게 상처를 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니콜라스가 돌아와서 이 수도원에 영원히 머물러주길 바라는 걸까. 어릴 때였다면 그랬겠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영영 떠나길 바랐다. 가장 먼 꿈에 닿아서 살아가길 바랐다. 처음과 같지는 않더라도,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렇게 살아가길 기도했다.그런데 니콜라스가 찾아왔다. 그날의 흉터를 팔에 남긴 채로.
2. 고해“잘 어울린다.”니콜라스가 의주의 사제복을 찬찬히 훑으며 말했다. 의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원망부터 해야 할까 아니면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늘 그랬듯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왜 왔어?”의주가 말하자 니콜라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너무한 거 아니야? 3년 만에 온 건데.”
“아니 정말 왜 왔냐고. 이유가 있어서 왔을 거 아니야.”니콜라스는 살짝 신경질 섞인 의주의 말에 실실거리며 웃고는 답했다.“너 데리러.”그 말을 듣자마자 의주는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하나도 안 변했어.“겨우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진짜야. 겨우라니. 가브리엘이 말 안 해줬어?”
“이제 수도원장님이야.”
“어 맞다. 그랬다 했지. 아무튼,”
“난 들은 거 없어.”
“딱 이틀만 머물 거야. 네 방에서.”
“어?”의주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니콜라스는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내 방에서?”
“어. 내가 저 아기들이랑 지내기엔 좀 그렇잖아 애들도 무서워할 거고.”
“그래도 내 허락도 없이 내 방에,”
“허락이 뭐 필요해. 매일 같이 잤었잖아, 우리.”니콜라스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의주는 괜히 얼굴이 화끈해졌다.“말을 왜 그런 식으로...”
“왜 뭐가?”결국 의주는 대꾸도 안 하고 뒤돌아 가버렸다. 니콜라스가 뒤에서 같이 가자고 소리를 치면서 달려왔다.“그러면 너,”의주가 말을 멈추고 뒤돌아서서는 옆에 놓여 있는 큰 바구니 하나를 집어 들어 니콜라스에게 거의 던지다시피 건넸다.“가서 레몬 수확하는 거나 좀 도와. 한가하게 놀지나 말고.”구시렁거리는 니콜라스를 뒤로하고 의주가 앞장서서 레몬 나무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도원장이 가브리엘로 바뀐 이후로 수도원의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지난 수도원장과 달리 가브리엘은 온화하고 이해심 깊은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한층 더 자유롭게 자라났고 의주를 포함한 다른 사제들도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레몬을 수확하는 일도, 예전에는 이 작은 시골 수도원의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아이들에게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같이 레몬을 수확하고 지중해의 햇살을 머금으면서 신나게 웃고 노래했다. 의주는 이렇게 바뀐 분위기의 수도원에서 니콜라스가 자랐다면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의주.”니콜라스가 레몬을 바구니에 담으며 말했다. 의주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아이들을 챙겼다.“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안 궁금해?”그러거나 말거나 니콜라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나는 댄스팀에 들어갔어. 거기 사람들 진짜 다 착하고 멋져. 너도 만나보면 좋을 텐데. 물론 너랑 성격이 엄청 다르긴 하다. 그래도 재밌지 않아? 나랑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만나는 거 말이야. 근데 너 밖에 제대로 나가본 적 있긴 해?”니콜라스의 물음에 의주는 멈칫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나라고 이 안에서만 평생 있었던 건 아니야. 일 때문에 밖에 나가본 적도 꽤 있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건 아니거든 나도.”
“나 너 재미없게 산다고 한 적 없는데.”니콜라스가 장난 섞인 말투로 말하자 의주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레몬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니콜라스에게 은근히 쏘아붙였다.“수도원장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널 받아준 건지 모르겠다. 진짜 뭐 하려고 온 거야? 나한테 자랑하려고? 나 놀리려고?”
“말했잖아. 너 데리러 왔다니까.”
“그걸 수도원장님한테도 그대로 말했어?”
“응.”
“뭐? 진짜로?”
“어. 가브리엘이 그러면 일단 와서 의주를 만나라고 했어. 설득되면 같이 나가도 된다고.”
“거짓말.”
“진짜라니까.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니콜라스가 말하자 의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많지. 난 다 기억해. 당장 열 살 때 수도원장님 베개에 개구리 넣게 시켰잖아. 축복을 빌어주는 행위라고 거짓말하고 말이야. 그래서 엄청 혼났던 거 기억 안 나? 그리고 열두 살 때,”
“아 의주, 그만해 그만! 그 정도는 그냥 어릴 때 그랬던 거잖아!”
“넌 타고난 거짓말쟁이야, 니콜라스. 또 누굴 속이려고.”의주는 이 말을 남기고 밭에서 뛰어놀고 있던 아이들을 챙겨 들어갔다. 니콜라스만 멍하니 레몬 나무밭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샛노란 레몬보다 더 밝은 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의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점점 멀어져가는, 자신과 달리 여전히 짙은 머리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수도원의 아이들 중 니콜라스를 기억하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니콜라스가 떠나고 새로 온 아이들은 니콜라스를 몰랐지만, 니콜라스가 떠나기 전부터 같이 있던 어린아이들은 어렴풋이 니콜라스를 기억하고 반겼다. 원래 저녁 식사 시간이 고요하진 않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소란스러웠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빤히 바라봤다. 머리색 하나 달라졌다고 이미지가 사뭇 많이 달라졌다. 분명 형제처럼 같은 머리색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새삼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게 와닿았다.“아 맞다, 의주.”소란스러운 저녁 식사가 끝나고 식당을 치우던 의주의 옆에서 접시를 같이 나르던 니콜라스가 말을 건넸다. 이번에도 의주는 시큰둥하게 답했다.“나 말이야, 어디서 왔는지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내 부모님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았다고.”시큰둥한 태도를 유지하던 의주는 들고 있던 접시를 덜컥 내려놓고는 니콜라스를 바라봤다.“진짜로?”
“어. 난 타이완에서 왔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더라. 그래도 내 뿌리를 찾았어. 아쉽게도 우리가 같은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니콜라스의 말에 의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우린 같은 언어를 두 개나 쓰는데도 다른 나라에서 왔던 거구나.“의주 넌 부모님 찾을 생각 없어? 넌 그래도 엄마랑 좀 살았었다며. 쉽게 찾을 수 있을 거 아니야.”
“... 찾아서 뭐 해.”맞는 말이었다. 지금 찾아간다고 해서 다시 그 집 자식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십 년이 훨씬 더 넘게 흘렀는데 지금 찾아간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더 비참해질 게 분명했다.“그냥. 궁금하잖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너를 여기 두고 갈 수밖에 없었는지. 너를 사랑했는지.”
“사랑했는지?”
“어. 난 모르거든. 내 어머니가 날 사랑했는데 어쩔 수 없이 이 수도원에 맡긴 건지 아니면... 그게 아니었는지. 근데 넌 알 수 있잖아. 그리고 내 생각에 의주는 사랑받았을 거야.”사랑받았을까. 나는 사랑받았을까. 데리러 온다는 그 말을 한 건 사랑해서 그랬던 걸까.“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의주는 황급히 접시들을 챙겨서 주방으로 가져갔다.
설거지가 끝나고 다시 저녁 기도를 드릴 시간이었다. 원래라면 이 시간이 가장 평온하고 고요한 시간이었다. 아이들도 하나둘 씻고 잠에 들 준비를 했고 하루의 혼란이 싹 다 정리되는 시간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옆에 니콜라스가 계속 의주를 따라왔기 때문이었다.“있잖아, 의주.”
“나 저녁 기도 해야 해.”
“그거 하루만 빼면 안 돼?”
“안 돼.”
“왜 하루만 빼 하루 빠진다고 하느님이 네 믿음을 의심하실까?”
“무슨, 그러실 분 아니야.”
“그럼 하루 빠져도 되겠네.”니콜라스는 언제나 사람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의주는 이런 니콜라스에게 항상 졌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의주가 항복을 선언하듯 니콜라스에게 묻자 니콜라스는 실실 웃으며 답했다.“너 있잖아... 밤에 로마 시내에 가본 적 있어?”
“어?”
“있어?”
“아니 없지. 가도 낮에만 갔어. 근데 갑자기 왜?”
“그럼 지금 가자.”
“뭐? 지금?”
“여기서 스쿠터 타면 금방이야. 빨리 가자 더 늦기 전에.”니콜라스가 의주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의주는 계속 니콜라스에게서 빠져나오려 했으나 니콜라스는 어릴 때부터 의주보다 힘이 셌다. 결국 의주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 하고 니콜라스에게 헬멧을 건네받아 썼다.“진짜 재밌을 거야.”니콜라스가 한 번 뒤돌아본 뒤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의주의 두 팔을 자기 허리에 꼭 감쌌다. 의주는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로 니콜라스의 등에 몸을 어색하게 기댔다. 스쿠터의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평온하고 고요한 밤을 찢어 놓고서는, 스쿠터가 앞으로 나아갔다.
저녁 바람이 선선하게 의주의 얼굴을 스쳤다. 의주의 인생에서 이렇게 빠르게 어딘가로 나아가본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저녁 기도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이렇게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고 죄스러웠지만, 점점 그 마음은 바람에 씻겨 날아갔다. 묘하게 웃음이 번져 나왔다. 사제복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가 웃겼다. 자유는 이렇게 웃긴 거구나.“재밌지!”바람 소리를 뚫고 니콜라스가 소리쳤다.“운전 똑바로 해!”의주는 웃음이 새어 나오면서 괜히 이런 말을 했다.
한 30분 정도 달리니 로마 시내가 금방 나왔다. 이렇게 가까웠나 싶은 정도였다. 해는 이미 다 졌는데도 충분히 밝았다. 사람들은 마치 낮인 것처럼 시내를 즐기고 있었다. 분명 낮에 다 봤던 풍경인데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어때? 낮이랑 전혀 다르지?”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에 대답할 틈도 없이 시내를 구경했다. 그런 의주를 니콜라스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바라봤다. 그러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저기 저 사람들이야, 내 댄스 크루.”니콜라스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을 의주가 바라봤다. 예닐곱 명의 젊은 사람들이 니콜라스를 보며 반가워하고 있었다.“오늘 댄스 버스킹 하기로 한 날이거든. 잘 보고 있어!”니콜라스는 의주를 뒤로하고 댄스 크루에게 달려갔다. 의주는 스쿠터에 기대어 가만히 니콜라스의 모습을 지켜봤다. 자유로운 옷과 헤어스타일의 사람들은 니콜라스와 정말 잘 어울렸다. 마치 니콜라스가 드디어 있어야 할 곳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시커먼 사제복을 입은 의주와 비교될 정도로 니콜라스의 세계는 알록달록했다.
낮은음으로 심장이 쿵쿵 울리는 음악이 시작되고 니콜라스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 공연을 보기 시작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 춤을 추던 그 어린 니콜라스가 생각났다. 그 형형색색의 햇볕 아래에서가 아니라 무대의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겠다 했으면서, 이런 가로등 조명 아래에서도 잘 췄다. 조명은 상관없었다. 어디에서 춤을 추든 상관없었다. 어릴 때, 의주는 니콜라스의 춤을 보면 불안했다. 금방 날아갈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불안하지 않았다. 이미 멀리에서 날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불안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렇게 넓은 세상에서 날아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내가 없는 너의 세상에서, 너는 너무 빛났다.공연이 끝나고 의주를 포함한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니콜라스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 의주에게로 다가왔다.“어땠어?”의주는 니콜라스의 표정을 보고 흠칫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그 작은 눈동자가 눈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멋있어. 진짜 잘하더라.”의주는 괜히 얼굴이 화끈해져서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그때 니콜라스의 뒤로 댄스 크루 사람들이 다가왔다.“니콜라스! 이분은 누구야?”
“아, 내 친구야. 요한.”
“신부님 친구가 다 있었네?”
“그러고 보니 니콜라스 너 어릴 때 수도원에서 살았다 했지?”
“맞아. 그때 같이 지냈던 친구야. 의, 아니 요한 이쪽은 나랑 같이 춤추는 사람들이야.”니콜라스의 말이 끝나자 의주는 멋쩍게 인사를 나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나를 의주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소개하는구나. 의주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곱씹었다.“잘 보러 오셨어요. 이게 미국으로 가기 전 마지막 버스킹이거든요.”
“... 네?”의주는 처음 듣는 소리에 되물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당황한 듯 대충 얼버무리고는 의주를 끌고 갔다.“그게 무슨 소리야? 미국에 간다고?”끌려가는 와중에도 의주가 계속 묻자 니콜라스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결국 한숨을 뱉듯 말을 뱉었다.“미안,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 진짜야?”
“어. 다 같이 미국에 가서 춤을 배우기로 했어. 다음 주에 떠나.”
“다음 주?”
의주가 계속 묻자 니콜라스는 의주의 눈을 피했다.
“왜 말 안 했어, 니콜.”
“말하려고 했어. 이틀 뒤에... 수도원 떠나기 직전에.”
“떠나기 직전에 말하려 했다고?”
“어. 넌 이번에도 수도원에 남을 거니까. 그래서 떠나기 직전에 말하려 했어.”
“... 그럼 넌 내가 이번에도 안 따라갈 걸 알면서 다시 나를 데리러 온 거야?”의주가 묻자 니콜라스는 말없이 스쿠터에 올라탔다. 의주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아까와 똑같은 길을 따라 달리는 거였는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아까처럼 니콜라스를 꽉 끌어안을 수 없었다.
각자 씻고 의주의 방으로 올라가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의주는 자신의 침대를 니콜라스에게 내어 주고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몇 시간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침묵을 깬 건 니콜라스였다. 어릴 때 싸우면 언제나 니콜라스가 먼저 굽혔던 것처럼.“이 방 이제 의주 방이 됐구나.”의주는 돌아누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다른 방들도 있는데 왜 이 방을 쓰게 된 거야? 딱히 좋은 추억이 있는 방도 아닌데.”의주가 돌아누운 벽에 니콜라스의 글씨가 보였다. 다시 데리러 올게.“네가 벽에 쓴 글씨를 봤어.”이번에는 니콜라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의주는 다시 한번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이 수도원에 네가 남아 있는 공간이 여기밖에 없었어.”의주는 이렇게 말하며 계속 벽의 글씨를 바라봤다. 그새 시간이 흘렀다고 글자가 조금 흐릿해졌다.“의주 내일 나 고해성사 좀 봐줘.”
“어?”니콜라스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의주는 니콜라스 쪽으로 돌아봤다. 니콜라스는 덤덤하게 천장을 보고 있었다.“너 이제 신부님 됐으니까 볼 수 있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왜 나한테?”
“한국어로 보게.”
“그래 그럼...”
“이제 잘게.”니콜라스가 말하고 눈을 감자 의주는 다시 돌아누웠다.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어릴 땐 잘도 같은 침대에서 같이 잤는데. 지금은 기분이 이상했다.다음날 니콜라스는 아침 미사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귀에 피어싱을 주렁주렁 매달고 요란한 티셔츠를 입고 팔에 큰 흉터를 단 채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은 상당히 어색했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중간에 실수가 몇 번 있었지만 무사히 연주를 마쳤다. 역시나 햇볕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니콜라스의 뒷모습까지 닿지 않았다.
무난하게 밤이 찾아왔고, 의주는 약속했던 대로 니콜라스의 고해성사를 봐주게 되었다. 평소에 아이들의 고해성사를 많이 봐주긴 했지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아마 한국어로 하는 탓일 수도 있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의주가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한국어로 말하니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죄를 고백하십시오.”
“... 솔직히 성사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니콜라스의 목소리가 가림막 너머로 들리자 의주는 순간 웃을 뻔했다. 겨우 웃음을 참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괜찮습니다. 죄를 고백하십시오.”
“... 저는 떠났습니다. 자꾸만 떠나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미 떠났으면서 또 멀리 떠나려고 했습니다. 떠난 후에 남는 이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떠났습니다.”니콜라스가 천천히 고해하기 시작했다. 의주는 가만히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들었다.“저는 자꾸만 저의 형제에게 같이 떠나자고 했습니다. 그 형제의 세상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이미 한 번 떠났으면서, 자꾸만 그 형제에게 돌아갔습니다.”니콜라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칠흑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의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영영 떠나던 그날 밤에, 저는 그 형제에게 피를 나눠주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영원히 함께하기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그 형제의 몸에 저의 피가 맴도는 한 저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피를 나눴습니다.”그 말을 듣자 의주의 입에서 그날의 맛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니콜라스의 피에 맹세했던 그날이 선명하게 그려졌다.“저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지 않습니다. 제가 믿었던 건 오로지 저의 형제뿐이었습니다. 제가 그날, 고해 기도문에 죄를 고백하지 않았던 건 하느님을 믿지 않았고 형제를 믿어서였습니다. 그 형제를 사랑하고 싶다고 적었던 건, 그 어떤 거짓과도 맞바꿀 수 없는 진심이었습니다. 아직도, 아직도 그 형제를 사랑하고 있어서 자꾸만 돌아오게 됩니다. 가장 먼 꿈조차 버리고,”의주는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고개를 들어봤자 보이는 건 가림막밖에 없었다.“... 가장 먼 꿈조차 버리고”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자꾸만 너에게로 달려오게 돼, 의주야.”의주는 고해성사를 대충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고해소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곧장 방으로 향하는 길에, 가브리엘을 마주쳤다.“요한?”가브리엘의 부르자 의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니콜라스와 있었군요.”의주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가브리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의주는 흠칫 놀랐다.“저는...”뭐라고 말해야 할까.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역겨웠고 두려웠다. 역시 그날, 니콜라스의 피를 마신 날 의주는 분명 흡혈귀가 되었던 게 분명했다. 흡혈귀는 나였어 흡혈귀는 나였어 흡혈귀는 나였어. 의주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저는 이제 용서받지 못해요.”의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가브리엘은 그런 의주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말했다.“떠나고 싶은 거였지? 처음부터.”그 말을 들은 순간 의주는 다시 일곱 살이 된 것 같았다. 처음 이 수도원에 와서 가브리엘의 손을 잡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무서웠고, 이곳에 남기 싫어서 슬펐던 그 순간으로.“니콜라스가 떠난 이후로 요한은 늘 니콜라스를 생각했지. 단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어떻게...”
“다 보였거든. 요한은 감정을 잘 못 숨겨서. 늘 창문 너머에 있을 니콜라스를 보고 있었거든.”의주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기분이었다.
이 수도원에 억지로라도 남아 있으려 했던 건 전부 다,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려 억지로 애썼던 것이었다. 그걸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어서, 인정하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아서. 변명은 끊임없이 나왔다. 하지만 그 구차한 변명들 사이에서 결국 한 가지 진심이 있었다면, 그건 다 니콜라스와 관련된 것이었다.“무서워요.”일곱 살 변의주가 울음을 삼키고는 가만히 서 있는 가브리엘을 지나쳐 방으로 뛰어갔다.
도망치듯 방에 들어온 의주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손에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도저히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꾹 감아도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니콜라스의 모습만 더 선명해졌다.“의주.”그러다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주는 들고 있던 십자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니콜라스와 마주 섰다.“... 너는 왜 자꾸 뭘 버리고 나한테 달려오는 거야.”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니콜라스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못 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난 사실 버릴 게 별로 없어.”니콜라스는 천천히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의주는 그런 니콜라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별로 소중한 게 많이 없어서, 그래서 별로 버릴 것도 없어.”니콜라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다 의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나한테 소중한 건 의주 너밖에 없어. 그래서 자꾸 버릴 걸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너한테 달려오는 거야. 네가 너무 소중해서. 아무것도 안 버리고는 얻을 수 없는 존재라서. 그래서 억지로 뭘 자꾸 버리고 너를,”
“그러지 마.”의주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니콜라스는 눈만 끔뻑거리며 의주를 바라보았다. 의주는 천천히 니콜라스의 앞으로 다가갔다.“난 우리가 읽었던 소설책 속 흡혈귀가 정말 존재한다면 너라고 생각했어, 니콜라스.”의주는 니콜라스에게로 서서히 몸을 기울였다.“내가 너의 피를 마셨던 그날 밤에, 난 우리가 정말 그 소설책 속 흡혈귀와 인간처럼 영원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래서 네 피를 마셨던 거야. 나도 너랑 영원하고 싶었으니까. 나조차도 모르게 나는, 너랑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니까.”의주는 니콜라스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가져다 댔다. 서로의 체온이 서서히 번졌다.“나는 널 볼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절대 이 죄를 고백하지 않았어. 두렵다고만 기도했지,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한 적은 없었어. 그건 내가 아마 너를, 너를 사랑해서 그랬던 거야. 사랑을 고해할 필요는 없으니까.”의주는 드디어 니콜라스에게 입을 맞출 수 있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 어떤 감정도 남지 않았다. 오로지 사랑만 남았다. 너를 향한 불안함도, 죄책감도, 동경도 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나는 늘 너를 기다렸어. 타고난 거짓말쟁이는 나였어. 네가 영영 돌아오지 않길 바랐던 것도 다 거짓말이었어. 데리러 오길 바랐어. 그날 마셨던 네 피를 기억하면서.
너와 몸을 섞는데도 죄를 짓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 내 몸에 이미 네 피가 흘러서일까.
3. 고백눈을 먼저 뜬 건 의주였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볕이 비춘 곳은 흐트러진 사제복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십자가 목걸이였다. 한 번도 저렇게 대충 흩트려 놓은 적이 없던 사제복이었다. 의주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아직 잠들어 있는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괜히 오른팔에 있는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그 흉터에 입을 살짝 맞췄다. 깊게도 잘 잔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이불을 더 끌어다 덮어주었다.챙길 짐은 별로 없었다. 사제복은 일부러 두고 가는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의주와 니콜라스에게 마지막으로 축복을 빌어주었다.“의주.”가브리엘이 요한 대신 의주라고 불러주자 의주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의주는 요한보다 의주가 어울렸다. 의주는 가브리엘을 한 번 껴안았다.“나는 너도 언젠가 떠날 거라 생각했단다.”가브리엘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 한 번도 니콜라스와 함께 떠나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걸 다만 늦게 알았을 뿐이었다.하지만 니콜라스는 그걸 기다려주는 사람이었다. 의주가 깨달을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사람. 의주는 이제 그 사람과 떠날 차례였다.의주는 마지막으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축복을 빌어주고 한 명씩 안아주었다.“진짜 가는 거예요?”미카엘이 눈물 맺힌 눈으로 말했다. 의주는 쭈그려 앉아 미카엘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제 더 이상 사제복을 입지 않아 옷 끝자락이 바닥에 닿을 일은 없었다.“미카엘, 네가 어느 세상에서 살아가든 너를 축복할게.”의주는 미카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일어났다. 가브리엘이 언젠가 의주와 미카엘이 닮았다고 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스쿠터를 타고 바람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향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스쿠터는 너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더 세게 끌어안아 등에 기댔다.“니콜라스.”
“왜, 의주.”
“더 이상 아무것도 버리지 마.”
“아무것도?”
“그리고 달려오지도 마.”
“왜?”
“내가 계속 네 옆에 있을 테니까.”
“영원히?”
“어. 아주 영원히.”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 어떤 존재에게도 바치는 기도가 아닌, 오직 너에게 고하는 나의 고백.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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